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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국대학교 최연우 교수님 기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자 2017-08-14
조회수 99
첨부파일

[단독]일제는 왜 비단 수의(壽衣)를 죄인 상징하는 '삼베 수의'로 바꿨나

조선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수의 모습. 삼베로 짓지 않아 부드럽고 하려하다. [사진 단국대]

조선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수의 모습. 삼베로 짓지 않아 부드럽고 하려하다. [사진 단국대]

 
일제가 죄인을 상징하는 삼베로 짠 수의(壽衣)를 집요하게 식민지 조선인에게 정착·확산시켜 왔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전통 수의는 삼베 아닌 비단 등으로 지어 부드럽고 화려해
상장례(喪葬禮) 중시하는 유교사상 속 비단수의 ‘효’로 여겨
하지만 일제에 의해 ‘죄인’ 등 입던 삼베 수의로 왜곡

단국대, "삼베 수의 보편화 정책 한민족 얼 피폐화 시켜"
삼베수의 본격 소개 조선인 '조선총톡부' 소속 교원 확인
삼베수의 담은 의례준칙 조선인 수탈 강화하려는 의도 보여
일제 잔재 수의 바로잡는 전통 수의 보급사업도 이뤄져
1474년 조선 성종 때 완성된 의례지침서인『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나 조선시대 분묘에서 출토된 복식 유물 등을 보면 우리 전통 수의는 삼베가 아닌 대게 비단이나 명주로 만들어 부드럽고 화려하다.
부드럽고 화려한 전통 수의. [사진 단국대]

부드럽고 화려한 전통 수의. [사진 단국대]


상장례(喪葬禮)를 중시하는 유교사상 속에서 민간 역시 비단 등으로 수의를 마련해 부모의 시신을 감싸는 것을 ‘효’로 여겼지만, 일제에 의해 ‘죄인’ 등이 입던 삼베 수의로 철저히 왜곡된 것이다. 현재도 삼베 수의가 전통 인냥 잘못 인식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중국산 삼베 수의. 전통 수의에 비해 단조롭고 거친 느낌이다. [사진 단국대]

중국산 삼베 수의. 전통 수의에 비해 단조롭고 거친 느낌이다. [사진 단국대]


최연우 단국대(전통의상학과) 교수의 논문 「현행 삼베수의의 등장배경 및 확산과정 연구」에서다. 해당 논문은 지난 6월 발간된 ㈔한복문화학회 학술지 한복문화(학술연구재단 등재지)에 게재됐다.  
조선시대 분묘 출토과정. [사진 단국대]

조선시대 분묘 출토과정. [사진 단국대]


14일 해당 논문에 따르면 1925년 삼베수의를 소개한 『조선재봉전서(朝鮮裁縫全書)』의 저자 김숙당(金淑堂·여)이 1916년부터 21년까지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촉탁직 교원으로 근무한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김숙당은 그동안  한국 최초의 재봉교재의 저자로 알려졌다.
 
평양여고보는 일제의 식민통치·수탈기관인 조선총독부의 직속기관이다.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보면, 김숙당은 월 급여로 15~50원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선재봉전서' 저자 김숙당의 과거 조선총독부 급여기록. [사진 단국대]

'조선재봉전서' 저자 김숙당의 과거 조선총독부 급여기록. [사진 단국대]


김숙당은 이후 사립학교인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옮겨 조선재봉전서를 쓰기에 이른다. 당시는 일제가 3·1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식민정책을 무력에 의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꾼 시기다.
 
그는 조선재봉전서에서 “중류사회에서 보통으로 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며 삼베 수의를 제시했는데, 교원이라는 신분을 활용해 현실과 동떨어진 수의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조선인 김숙당이 왜 삼베수의 정착에 발벗고 나섰는 지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실제 우리 민족은 삼베를 수의 소재로 사용하길 꺼렸다. 삼베 옷은 죄인이 입은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때 피난 중인 선조를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인이 된 성리학자 성혼(成渾·1535~98)은 자신의 유서에 “나는 군부에게 죄를 얻었으니 (중략) 옷은 삼베옷으로 하고 염은 삼베이불로 하며 (중략) 나의 뜻을 어김이 없도록 하라”고 한 기록이 광해군 일기(3권)에 전해진다.
조선시대 전례서(典禮書:의례지침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수의는 모두 견직물(실크)을 사용한다고 돼 있다. [사진 단국대]

조선시대 전례서(典禮書:의례지침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수의는 모두 견직물(실크)을 사용한다고 돼 있다. [사진 단국대]


부모를 여읜 자식은 ‘죄인’이라는 의미로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었다. 전통 수의는 생전 입던 옷 가운데 가장 좋은 걸로 마련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입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죽했으면 삼베랴”라는 표현이 구전될 정도로 서민들도 등한시 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김숙당이 내세운 삼베 수의를 『의례준칙(儀禮準則·1934년)』담아 공포, 조선사회내 정착·확산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김숙당이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근거는 전해지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의례준칙 속 삼베수의의 토대를 마련해준 셈이다.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의례준칙. [사진 단국대]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의례준칙. [사진 단국대]


조선총독부는 공무원 조직을 활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각종 단체, 이동 강연회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 의례준칙 뿌리 내리기에 나선다.현재 삼베 수의는
역대 대통령이나 심지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마지막 길에도 쓰였다.
 
삼베 수의는 수탈을 더욱 공고히하려한 식민정책의 일환이라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의례준칙 공포 당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은 구태의 개선을 내세우고 있지만, 본격적인 전시체제를 앞두고 이뤄져서다. 일제는 공포 2년 후인 1937년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의례준칙을 통해 식민 조선인의 궁핍한 삶을 개선하려는 게 아닌 절약한 물자를 국방금(물품)으로 헌납하게 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1938년 11월 경북 김천의 상가에서 준칙에 따라 상례를 치른 후 절약한 현금을 대구신사(神社)에 헌납한 인물의 선행을 알리는 내용의 기사가 일간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복원한 전통 수의 앞에서 사진촬영하는 단국대 최연우 교수. [사진 단국대]

복원한 전통 수의 앞에서 사진촬영하는 단국대 최연우 교수. [사진 단국대]

최 교수는 “죄인을 형상화하는 삼베수의를 보편화해 식민지 조선인들의 정신을 피폐화시켰다”며 “농가부업으로 장려해놓고 수익금의 일부를 국방금으로 헌납하게 한 ‘가마니짜기’처럼 삼베수의의 확산으로 얻은 잉여 자산이나 물자를 수탈하기도 했다.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단국대는 지난해 ‘땅으로 시집가는 날’이라는 전통수의 전시회를 여는 등 전통 수의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용인=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단독]일제는 왜 비단 수의(壽衣)를 죄인 상징하는 '삼베 수의'로 바꿨나